작성일 : 18-12-21 03:05
이삼평
 글쓴이 : kanta998
조회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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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이삼평

 

조선에서 끌려간 일본 자기(瓷器)의 시조

 

[李參平]

 

 

 

 

 

 

 

 

 

출생 - 사망

? ~ 1655

 

 

 

 

 

 

 

 

왜군에 사로잡혀 이삼평에서 가나가에 산베이로

 

일본이 자랑하는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李參平, 출생년 미상~1655). 그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히젠 국(肥前国) 사가 번(佐賀藩)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의 군대에 사로잡혔다. 나베시마는 임진왜란 때에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휘하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삼평이 조선에 살 때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생지가 충남 공주(1990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기념비가 세워짐)로 추정되지만, 경남 김해설과 전북 남원설도 있다. 공주 근처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도편(陶片)들과 아리타 지역의 초기 도편들이 같다는 점이 공주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나베시마의 사위이자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이삼평은 가나가에 산베이(江三兵衛)라는 일본 이름을 얻는데, 출신지 공주의 금강(錦江)에서 한자를 바꾸고 삼평이라는 조선 이름의 발음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가나가에 산베이, 즉 이삼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653년경의 기록으로, 이삼평 자신이 다쿠 가문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일본에 도착한 다음 몇 년간 다쿠 야스토시를 위해 일했으며, 18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쿠 지역에서 아리타로 1616년에 이주했다.

 

일부 학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에도 큐슈 사가현 북부 가라쓰(唐津)의 하타(波多) 가문 영지에 조선인 자기장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다 가라쓰의 하타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장인들도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 앞서 언급한 기록에는 이삼평과 함께 이주한 18명 중 다쿠에 본래 있던 도공들’ 3명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에 와 있던 조선 자기장들이라는 추측이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삼평이 본래 자기장이 아니었으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기술을 배웠으리라 보기도 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추측이다.

 

이삼평의 일본 최초 자기 생산과 아리타 자기의 발전

 

이삼평이 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 나베시마의 영지 일대를 전전하다가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태토(胎土- 도자기를 만드는데 바탕이 되는 흙)가 되는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하고,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기를 생산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유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이 요(-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를 연지 300주년이 되던 1917년에 이삼평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을 시작으로 아리타 지역에는 자기 가마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에 나베시마번 측은 어지러워진 생산 체계를 정리하고 자기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자기장들을 중심으로 13개의 가마로 재편했다. 또한 가마들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효율적인 분업 체계를 만들었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 이후 나베시마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01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했다. 일본 최초의 자기 수출이었다. 이후 1659년에는 567백 개의 아리타 자기를 주문했다. 유럽에 대량 수출된 아리타 자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일본 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세기 중후반 당시 중국은 이른바 명청(明淸) 교체기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오삼계(吳三桂)의 반란까지 일어나 자기 생산과 수출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정세도 아리타 자기의 유럽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아리타 자기를 이마리(伊萬里) 자기라고도 하는데, 아리타에서 가까운 이마리 항구로 옮겨 출하했기 때문이다.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개의 아리타 자기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오늘날 아리타의 아리타 포세린파크(도자기공원)에는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궁전을 본 딴 전시관이 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아우구스트 2)는 동양 문물에 심취하여 츠빙거 궁전 안에 인도궁, 일본궁 등을 조성하고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수집했다. 이 가운에 일본궁은 오늘날 도자 갤러리 구실을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도자 수집품 가운데 아리타 자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리타 자기는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동양 취미 붐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까지 도자기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앞선 생산기술을 보유한 조선과 그렇지 못한 일본의 관계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끌려간 조선 자기장들을 바탕으로 기술 혁신을 이룬 일본에서 도자기 산업이 번성하면서부터 그 관계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19세기 유럽에서 자동화된 생산기계를 수입하여 대량 생산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조선과의 격차를 넓혔다. 결국 19세기 말부터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도자기 제품이 조선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도자기 전쟁과 조선의 자기장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할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자기장들을 사로잡아 데려가고 조선의 도자기를 가져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자기 전쟁에서 범위를 넓히면 문화 약탈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도서부(전적), 공예부(장인), 포로부(한의사, 젊은 남녀), 금속부(병기, 금속 예술품), 보물부(금은보화), 축부(가축) 등의 별도 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과 인력을 약탈했던 것이다. 다카도리야키(高取窯), 사쓰마야키(薩摩窯), 아카노야키(上野窯) 등 일본의 많은 주요 도자기 생산지들이 끌려온 조선 자기장들에 의해 발전했다. (‘도공이라는 표현은 주로 일본에서 많이 쓰며 자기장, 사기장, 장인 등의 표현이 적합하다는 주장이 있다.)

 

 

 

아리타 지역에서도 이삼평 외에 조선에서 끌려온 김해 출신 여성 자기장 백파선(百婆仙)이 활동했다. 백파선은 김해의 자기장 김태도(金泰道)의 아내였다. 이들은 사가현 서부 다케오(武雄) 지역에서 자기장 집단을 이끌며 생산을 하다가 김태도가 세상을 떠났고, 아리타 지역을 집중 육성하려는 나베시마번 측의 결정으로 아리타로 이주했다. 아리타의 호온지(報恩寺)에는 백파선의 후손이 세운 법탑(法塔)이 서 있다.

 

조선 자기장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일본은 도기 생산에 만족해야 했고 기술적으로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생산 재료, 가마의 구조, 제작 기법, 안료 개발 등 많은 측면에서 조선 자기장들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을 혁신시켰다. 이마리에는 조선 자기장들의 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