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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의 ‘앨리스 인 베드’(연출 이연주)는 20세기 후반 미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작가 수잔 손택이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한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병마와 싸우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기 작가 앨리스 제임스를 다루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수잔 손택(1933~2004)은 20세기 후반 미국 뉴욕 지성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1963년 실험적인 소설 ‘은인’과 이듬해 ‘캠프에 관하여’라는 평론으로 주목받은 손택은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철학 문학 사진 영화 연극 등 전방위적 영역을 넘나든 손택의 글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연극과 관련해 손택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주요 예술가 중 하나였던 아방가르드 연극의 거장 앙토냉 아르토에 대한 비평을 쓰는가 하면 영화와 비교해 연극의 본질을 사유하는 에세이 등을 남겼다.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1990) ‘파르지팔’(1991) ‘앨리스 인 베드’(1993) ‘바다에서 온 여인’(1998) 등 4편의 희곡을 썼으며 1993년 보스니아 사태 당시 사라예보를 방문해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다.국립극단이 지난 24일 개막해 오는 1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앨리스 인 베드’는 손택이 유일하게 생전에 출판한 희곡이다. 국립극단이 이 작품을 손택이 남긴 유일한 희곡이라고 소개한 것은 팩트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2001년 로버트 윌슨 연출로 선보였던 ‘바다에서 온 여인’ 등 나머지 세 편은 원작인 소설, 오페라, 희곡을 토대로 손택이 다시 썼다는 점에서 ‘앨리스 인 베드’가 가장 독창적이다. 손택도 “평생 ‘앨리스 인 베드’를 쓰기 위해 준비해온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앨리스 인 베드’는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인 앨리스 제임스(1848~1892)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앨리스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와 소설 ‘여인의 초상’ 등을 쓴 미국 문학의 거장 헨리 제임스의 여동생이다. 열아홉 살에 발발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평생을 투병한 앨리스는 마흔넷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40년이 흐른 뒤 병상에서 쓴 일기가 출간돼 ‘일기작가’로 평가받은 앨리스는 1980년 전기 출간과 함께 비로소 그 삶이 입체적으로 조명됐다. 앨리스가 오빠들 못지않은 천재였지만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등 고통을 겪다 자신의 삶을 파괴했음이 뚜렷하게 드러났다.손택이 ‘앨리스 인 베드’를 집필한 것도 자신의 질병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는 등 작가로서 날카로운 감각을 보여준 앨리스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앨리스 인 베드’(Alice in bed)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극 중 토끼와 티파티하는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담고 있다.앨리스의 상상 속 세상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오빠 등이 나오는 현실과 달리 따뜻하고 유쾌하다. 상상 속 세상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남성들에게 악녀로 오해받는 여성들이다. 실제 인물로는 미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받았지만 요절한 평론가 마가렛 풀러(1810~1850)와 사후에 천재 시인으로 인정받은 에밀리 디킨스(1830~1886)가 나온다. 예술 작품 속 인물로 발레 ‘지젤’에서 남자들을 죽음으로 모는 윌리 여왕 미르타와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에서 성배 기사들을 유혹해 타락시키는 마녀 쿤드리가 등장한다. 앨리스는 이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여는데,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손택은 이 작품의 서문에 “이 책은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들과 여성들의 어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자의식에 관한 희곡이다”라고 밝혔는데, 앨리스의 티파티는 손택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국내 초연인 ‘앨리스 인 베드’의 연출은 극단 전화벨이 울린다의 대표이자 극작가 겸 연출가 이연주가 맡았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인 이연주는 ‘이반검열’ ‘전화벨이 울린다’ ‘삼풍백화점’ ‘이게 마지막이야’ 등을 통해 집단의 폭력성과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특히 장애인 극단 애인과 꾸준히 작업하는 등 소수자를 톺아보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이연주가 연출한 ‘앨리스 인 베드’의 특징은 출연진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배우들이 앨리스의 아빠와 오빠를 비롯해 남성의 역할도 모두 연기한다. 주인공 앨리스를 한 명의 배우가 아닌 여러 명의 배우가 맡는 것도 특징이다.최근 국내 연극계에서 배역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거나 성별을 바꿔 연기하는 젠더프리·젠더벤딩 캐스팅이 붐을 이루는 만큼 여배우만 출연하는 ‘앨리스 인 베드’는 색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의 여성주의 관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여배우만 출연한 게 효과적이었다고 보인다. 이 연출가는 “배우들이 극 중에서 서로 앨리스가 돼 보고 각각 다른 인물로 만나면서 앨리스를 자신만의 시선과 목소리로 표현하게 했다. 질병과 장애를 경험한 앨리스의 세계가 어떻게 관객들과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스스로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이번 작품은 앨리스 등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이 연출가는 자막이나 해설을 통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관극의 문턱을 낮추는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공연 내내 관객에게 감정이입 대신 거리두기를 통해 앨리스의 세계를 이성적으로 보라고 요구한다.